2022.12.06.

받은 글

영원, 그것은 하나로 뒤섞인 태양과 바다.

편지지와 일기장을 샀습니다. 손편지를 쓸 적이면 조심스레 모아둔 엽서를 쓰고, 일기는 쓸 성격이 영 못 되임을 잘 알고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종종 편지지를 고릅니다. 그렇게 부치지 못 할 편지를 쓰고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일기를 씁니다. 遺書. 혹은 回顧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긴 줄글을 쓰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상상을 합니다. 설령 발견된다 하여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흔한 글이 될 것을 상상합니다. 그것을 바라서가 아니라 그러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뒤 전해지는 편지는 수신인에 의해 단 한 번만 노래될 것이며 나를 전부 담아낸 일기장은 재가 되어버리겠지요, 시간에 의하여. 장작을 태워 개화하는 불과는 달리 순간의 반짝임도 남기지 못하고 그렇게. 그리하여 나는 그에게 回顧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다 생각했습니다.

告解.

이곳에 세례를 받은 이는 커녕 기꺼이 지옥으로의 열차에 오를 이들밖에는 없겠으나. 나는 기꺼이 종이라는 하이얀 눈밭에 나를 써내립니다. 시간이 언젠가 그것을 다 태워버리면 나의 죄는 사하게 될까요.

사회에 대해 생각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가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벗어나고만 싶습니다. 훌쩍 떠나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만 여행은 싫어합니다. 반드시 돌아와야만 하는 공간과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 수 있는 곳이 한없이 많아도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똑같아서…

내가 어디로 도망할 수 있을까요, 이 사회를 벗어나면 또 다른 사회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내가 이제껏 가져온 나의 모든 것이 가치를 잃고 나뒹굴 저 빌어먹을 자연으로의 회귀는 사양입니다. 인간 사회가 스스럽습니다, 생활이 스스럽습니다.

취할 수는 없을까요, 영영. 영원히 깨지 않는 꿈 속이라면 영원한 고통과 저주라도 감내할 터인데.

어쩌면 나는 이러한 내 가상의, 꿈에 세계에 있는 생만 예찬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저주 속의 죽음이라면 필히 신화가 되이겠지요. 반짝이는 금빛 조명 아래서 수백번이고 노래될 하나의 신화. 낯이 바뀌고 언어가 바뀌어도 동일한 이름일 … 신화.

이 지옥 같은 한철을 어떻게 보낼까. 앞으로 한 발 내딛거나, 뒤로 물러서거나, 그대로 주저앉거나.

비스듬한 금빛 태양이 날아오르네.

한 거인이 창살 위를 걷네, 오, 탄생이여, 오, 축복받을 죽음이여.

차운 철창 아래로 흰 초가 녹아흐르네.

거대한 손이 얼굴을 감싸 뒤집히네, 푸른 옷자락만 가벼이 틈새를 비집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