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2.
가을의 바람을 맞이합니다. 포근한 외투의 감촉을 느끼며 제 속으로 파고들면 코끝을 시리는 가벼운 공기. 어떤 향이라도 더욱 그득하게 담아주고는 하는 가을의 아침 바람은 꼭 그 햇빛마저도 넉넉히 담아주어 더욱 청량합니다.
삶을 느낍니다. 내 발 닿는 모든 걸음과 시선 닿는 모든 글자들에서. 타인과 똑같이 다닌다는 것에서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고 그럼에도 나만이 아는 색을 그리고 나만이 아는 문장을 속삭이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낍니다. 나는 삶을 느낍니다, 삶을 느껴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새카만 강물에서 차운 것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차게 식어가고 죽음이 죽음인지 알지 못하던 그 심정을 건져올리고 눈을 떠서. … 그렇게 태어남을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종종 죽음을 느낍니다. 나의 죽음은 거칠지 아니합니다. 거칠고 아프지 아니하고 다만 어두울 뿐이라. 그것은 고요히 흘러갑니다. 내 옆에서 아주 조용히, 그저 평소와 같이. 삶을 속삭일 적의 나는 마치 아침 해가 강물에 빛나는 것을 보듯 아름답다 박수치고 그 붉은 빛을 눈에 그득하게 담습니다. 붉고 맑게 출렁여 빛나는 강. 더더욱 커다랗게 빛이 나서 나를 압도하는 아름다움. 찰박이며 장난을 쳐도 그저 투명히 나를 받아줄. 그 부드럽고 숨막히는 것에 안기고픈 충동. 내가 느꼈던 어떤 바람도 햇빛도 그저 검게 물들어 더 금은 곳으로 오라는 나른한 손짓. 출렁이며 느리게 흐르는 소리가 여전히.
생을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삶은 나를 천천히 살해하고 있었다.
목적을 정의함으로써 태어난 삶은 목적의 의미를 망각하고는 해서, 여전히 그것의 시초가 고요히 흐르는 소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살아내어야 할 것이다. 다시금 소리가 들려올 적이면 나의 흔적들을 붙들고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를 일깨운 것들, 바람에 실린 아까시 향기… 아무리 되짚고 톺아도 더 이상 내게 감흥 주지 않는 글자와 색이 나를 날카롭게 할퀸다. 더는 무엇도 뱉어내지 못하는 심장을 마구잡이로 욕한다. 자신들을 보듬어줄 손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들아, 내가 창조하야 나만이 이해할 나의 아이들아…
그것은 가장 날카롭고 또한 가장 따듯한 흉기로, 시야를 도려내고 단어를 속삭였다. 느릿한 추락. 활공이라 착각한 추락. 박제되지도 못할 흉한 날개를 짓이긴다.
그러나 그 모든 의미를 망각한 순간에도 나는 죽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쓰지 못하고 그리지 못하여 나의 것들마저 나를 할퀴고 아프게 하는 순간에도, 그 실낱같은 가능성에 매달려, 다시 새로이 눈을 뜨고 바람의 향기를 즐기고 지나친 나뭇잎에서 녹빛의 푸르름을 읽고 걷는 걸음마다 사념과 색채를 섞어 벅차오르는 그 감각, 그것을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아픔을 참아내리라 다짐합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깔딱이는 숨을, 무력하게 나뒹구는 펜을 정리하며 나는. 다시 나의 이름을 사랑할 순간을 위해.
잠 이루지 못하여 흔적을 더듬었으나 발걸음 내딛는 족족 나는 죽어버려 하나의 괴물이 되었소
어둠 속 불빛 찾아 죽어있던 공기의 숨을 맡으니 아아, 이곳은 정녕 산 자들의 사막이구나 감박이는 점멸등 아래 몸을 구긴다
우리는 다른 죽음에서 같은 삶을 속삭이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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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누구에게도 탄생을 알리지 못한 나의 아이들이 아주 우연한 순간에 축복받은 것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