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3.
녹슨 심장이 달그락대는 소리. カトラリー가 쨍강쨍강 바닥을 이는 소리. 소년이 속삭인다, 살아가는 것이란 정지가 아니라 끊임없는 역전 행동이야, 죽음으로 행진하는 시간 아래서 조금이라도 미뤄보겠다는 의지의 표명.
새의 활공이 특별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중력에 몸을 의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초월이 특별한 이유는 모든 초월 뒤에 또다른 초월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이 특별한 이유는 우리 이외의 모든 것이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날갯짓이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모든 새는 땅에서 태어납니다, 갑작스레 태어나 가장 밝게 빛나는 별도 종국에 하나의 상식이 되이고 맙니다. 생의 활공과 초월 뒤에는 수없는 상처와 또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있겠지요.
삶이란 마치 겨울철 창문가에 달라붙어 불어넣는 숨과 같아서, 희게 차오르다가도 또 얼룩을 남기며 사그라들곤 합니다.
… 위의 글은 (기록에 따르면) 2월 15일에 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래의 내용은 3월 2일에 쓴 것을 조금 다듬은 것이고요.
편지를 다시 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 몇 번이고 되새기며 상상한 글을 힘겹게 적어나간 그 시간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고해告解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성사聖事 따위는 바라지 않는.
새진에게 바다를 보여준 그 날, 외할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목포의 바다를 보며 중반을 챙길 적에도 나는 이 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스니다. 바다를 보고 싶다 가볍게 던진 말을 기억하신 어머니는 우리 둘만이라도 목포엘, 아니면 동해에 놀러갈까, 그리 말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해안에 서식한다는 희귀한 새를 상상하는 것으로 무료한 차 안에서의 시간을 보낼 정도였으니까요.
거의 10년만에 다시 보는 그 모습은 내가 얼마나 시간에—죽음에— 무지한지, 나를 그 사실로 떠밀었습니다. 피부는 하얗게 변하고, 그보다도 머리는 더욱 새하얗게 물들어 수척해진 몸을 돌리거나 뒤채지도 못하고 그 검은 눈동자가 우리를 응시하는 그 모습이. 바람에 흔들리는 호롱불처럼, 거의 다 녹아버린 양초처럼 흐릿이, 느릿이 꺼져가는 그 생이.
나는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추락은 너무나도 느려서, 이렇게 서신을 쓰는 지금도 여전한 속력으로 꺼져가고 있겠지요.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 앞에서 나는 도망칠 수 없었고, 웃음을 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날 밤까지 동행한 가족 앞에서는 더더욱 울 수 없었습니다. 그 날 밤에도 울음은 나오지 않았고, 다만 유리 구슬처럼 깊고 어두운 검은 눈동자에 비친 천장의 조명이 얼마나 맑게 희였던가, 그것만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습니다.
저는 죽음과 먼 사람입니다. (물론 사고는 어쩔 수 없을 것이고, 제가 여기서 두 세배 이상 나이가 든다면 가족의 병이 시작될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태어나고부터 지금까지는.) 그래서 자주 되묻습니다, 나는 죽음을 이리 논할 권리가 있나? 사실 제 인생만 놓고 본다면, 제가 이리도 죽음에 대해 확고한 생각—혐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나도, 내 주변의 사람도, 혹은 그저 우연히 마주한 사고도, 제겐 없었으니까요. 삶을 사랑해서 죽음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너무나 혐오한 나머지 지극한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제가 겪은 것이라곤 그저 아득한 무, 죽은 뒤의 그 아득함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