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6

받은 글

어떤 시계가 있다, 홀로 42시간을 24시간으로 사는 시계가 있다. 그는 단지 12일을 21일로 살 뿐이라.

당신의 결핍은 더 이상 온기가 아닐 것이다. 자신을 전부 태워버리는 초에게 온기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면 무엇이 부재하는가. 그 초는 공기가 결핍되었다. 자신이 존재하는 그 방의 모든 공기를 태우고 나면 촛대도 딱 알맞게 타 버릴 것이다. 그에게 숨을 주는 것이 그 방 뿐이기 때문이리라.

나 차라리 그대께 침잠을 종용하여 볼까, 하면 당신은 살겠노라 답한다.

그렇게 불타는 초는 생을 찬미한다, 생의 찬미자는 곧장 죽음의 찬미자가 된다. 그 끝을 알면서도 타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글에서 생이 아닌 삶을 본다. 뛰어노는 아이, 함께 웃듯 피어오른 노란 꽃과 그 위에 부서지는 햇살. 그러나 당신은—

그네는 어찌하야 내가 당신에게서 다시 삶을 볼 적에 또 죽음에서 살려 하는가.

그대 몽중에서 살길 거부한다 말한다. 나 또한 안다, 그대는 살아있다, 살아있다. 그 살아있음에 삶은 어디로 갔는가. 웃을 수 있고 또한 울을 수 있으며 째깍이는 초침과 분침과 시침의 그 숫자를 읽을 수 있고 그러하지 않아도 해와 달이 알리는 시간을 읽으며 초목을 통해 계절을 체감할 당신은 또 어디로 갔는가.

당신의 그 생에 삶은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도망쳤는가.

나는 그 미약한 등불 따라 꽃을 본다. 그들을 매만지고 또한 함께한다. 경각의 꿈임을 아는 몽중이니 이는 자각몽이다. 누구도 자각몽에서 살지는 않으리다. 하니 나는 그 웃음 따라 웃었다. 당신이 가리고자 하는 것에 따른다. 나의 결핍은 이해이기 때문이리라, 나 당신을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이리라. 하니 나는 묻는다, 당신의 모순에 묻는다.

그대 몽중에서 살길 거부한다 말했다.